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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모-대지의 여신, 하늘을 품다 - 이숙자 다시보기
이지윤 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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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석우-보리밭에 담아낸 한국 여인의 정념
최준-보리밭에 부는 바람의 영혼을 그린다
빠뜨리스 드 라 페리에르 평문
김상철-보리밭 사이 길로 걸어가면
김영재-공필과 기운의 생동하는 화음
고충환-이브의 보리밭, 삶의 근성과 에로스
유석우-21세기 현대작가 시리즈
오광수-현실과 환상 -이숙자 展에-
김종근-보리밭을 통한 삶의 표현

정준모-대지의 여신, 하늘을 품다 - 이숙자 다시보기



대지의 여신, 하늘을 품다 
이숙자 다시보기 

글/ 정준모(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미술비평, 문화정책) 

글의 들머리에서 
한동안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또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최고의 가치로 신봉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후 화두는 세계화, 국제화 그리고 지구화로 옮겨가면서 그렇게 부르짖던 우리 것에 대한 열기는 눈 녹듯 사라졌다. 우리 것을 지키고 발전시켜나가자는데 이론이 있을 수 없지만 또 세계화, 국제화 대열에서 뒤쳐질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 것, 전통을 간과하고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자니 조금 꺼림칙하고, 전통에 매몰되자니 고장 난 시계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다. 
물론 전통과 새로운 시대는 모두 중요하다. 다만 어느 한 곳에 치우쳐서 전통에 또는 새로운 시대정신에 함몰되어 그것이 전부인양 생각하고 대하는 태도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전통이라고 해서 무작정 보호하고 육성해야 하는 것이 아니듯이 새로운 시대정신 이라 하여 모두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동시에 국제적인 감각을 아울러 갖추는 일은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인심이 어디 그러하던가. 전통을 숭상하지 않으면 지구상에서 우리민족이, 대한민국이 사라지고 말 듯 호들갑을 떨다가 때로는 세계화 국제화 아니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sation)이나 인터널라이제이션 (Internalization)이라는 우리말 보다는 영어를 사용하면서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시대에 적응하는 또는 시대를 선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일관성 없이 한글날이나 광복절이 다가오면 전통주의자가 되었다가 국제화 세계화의 주역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통은 지켜져야 하고 또 계승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세계화와 국제화도 간단없이 추진되어야 한다. 
어느 것 하나를 버리고 취할 것이 아니라 전통과 세계화는 함께 가져가야할 등가의 가치이다. 그리고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전통, 시대에 맞는 우리의 또 다른 전통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통에 대한 인식은 언제나 지켜야 할 것, 원형을 보존해야 할 것에 집중된 경향을 보여 왔다. 그러다 보니 시대와 동떨어진, 구식의, 낡은 원형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아닐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동안 거세게 불어 닥친 세계화 국제화 바람은 서구화에 이어 곧 현대화를 의미하면서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식되었다. 아마도 이런 한국적 풍토는 구 한 말 쇄국정책으로 인해 문호개방이 늦었고 그로 인해 근대화가 더디게 진행됨으로써 세계와의 소통이 늦어지고 따라서 열강의 침략을 받고 결국 일제강점을 불러왔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일로 짐작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서구화는 곧 현대화를 의미했고 현대화는 잘 사는 국가, 우리가 꿈에 그리는 선진조국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에게 전통이란 서구화, 현대화로의 이동을 지체시키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는 생각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은 아닐까. 이런 인식의 결과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일부 문화재 전문부서와 박물관의 임무로 미루어두고 우리는 오직 세계화 국제화를 통한 현대화를 택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 낳은 여러 문제 중 미술계에서 드러난 대표적인 것이 한국화의 문제이다. 한국화는 우리 전통회화의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시대에 뒤 떨어진 것이라는 인식과 요즘의 주거환경에 맞지 않는다는 선입견 등으로 인해 이제는 박물관 진열장에서나 만날 수 있는 역사적인 유물이 되고 말았다. 
물론 이런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은 한국화의 외부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시대가 급변한 탓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한국화단 내부에도 그 이유는 상존한다. 우선 한국화라는 용어조차도 모호하다. 일부 전통화가들은 동양화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어떤 사람들은 한국화라고 부른다. 앞으로 시간이 흘러 우리 2세, 3세대에 이르면 동양화와 한국화가 별도의 다른 양식의 회화로 서로 다른 것으로 오해 할 여지조차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자신들의 회화양식에 대한 호칭마저도 통일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화단 외적인 부분에서 자신들 회화에 대한 정체와 부진의 원인을 돌리려 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한국화, 그 부침의 역사 
한국화의 역사는 매우 깊고도 광범위하다. 특히 한국 회화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반구대 암각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에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하면서 회화도 시작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후 한국회화의 역사는 삼국시대에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회화로 발달했다. 
이런 사례를 잘 보여주는 것은 만주와 평양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벽화이다. 시대에 따라 대상이나 주제가 변화하면서 그 한국화는 자신의 모습을 정립해 왔는데 초기 고분벽화가 묘지 주인의 초상을 중심으로 풍속화적 요소와 불교적 요소가 두드러졌다면 이후 무용총의 수렵도는 활력 넘치는 화풍과 생생한 인물묘사가 두드러진다. 6세기 말과 7세기 초반의 사신총, 강서대묘 등 후기 고분벽화에는 수호신의 성격이 강한 사신도가 주로 그려졌다. 
백제 회화는 현존하는 유물의 희소성 때문에 그 전모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고구려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독창적이면서 높은 수준의 회화세계를 꽃피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역동적인 고구려 벽화에 비해 박진감은 떨어지나 유려하고 부드러운 선과 안정된 공간구성이 두드러지는 것을 송산리, 능산리 고분벽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신라는 상대적으로 회화자료가 더 빈약하지만 천마총에서 발굴된 천마도와 기마인물도, 서조도를 통해 신라회화의 수준을 알 수 있으며 삼국사에 의하면 선덕여왕 이전에 조선시대 도화서에 해당하는 채전(彩典)을 두어 회화를 관장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는  회화의 발전을 보여주는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지만 솔거(率居)와 같은 화가들의 이름이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회화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던 것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도화원에 소속된 직업적인 전문화가인 화원과 왕공사대부 및 승려들이 즐겨 그림을 그렸다. 현재 전해지지는 않지만 이령(李寧)은 중국 송나라에까지 그의 재능이 알려져 황제가 직접 그림을 그리도록 요청했다고 전해질 정도이다. 또한 산수화뿐만 아니라 초상화를 비롯 영모, 화조, 누각, 사군자 등과 기록화적인 성격이 강한 기로회도(耆老會圖) 등이 그려졌으며, 불화 또한 높은 수준을 이루었다. 
조선시대는 한국 미술사상 회화가 가장 발달한 시기로 도화서를 통해 배출된 화원들과 사대부 문인화가들에 의해 큰 발전이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몽유도원도를 통해 회화의 품격을 올린 안견(安堅)과 사대부 출신으로 절파화풍을 수용한 강희안, 안평대군, 천민 출신으로 남송 원체화풍을 받아들여 뛰어난 회화적 경지를 이룬 이상좌, 영모화에 능했던 이암 등에 의해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 밖에 이장손, 최숙창 같은 이는 미법산수(米法山水)에서 경지에 이르렀다.  이후 임란과 호란에도 불구하고 조선회화의 맥을 이어오면서 조선 중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명 말에 시작된 남종화를 숭상하고 북종화계인 절파를 천시하는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으로 인해 조선회화도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런 변화는 명 •청대 회화를 수용하면서 보다 민족적인 색채를 띠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게 된다. 실학의 발전과 상인 역관 등 중인들이 대두되면서 진경이라는 새로운 화풍이 정착되는 듯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진경은 쇠퇴하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중심으로 남종화풍이 자리하면서 이른바 추사파와 남종화풍이 주를 이룬다. 
이런 회화사의 변화는 직업 화가들을 천시하고 문인화가들을 귀히 여기는 풍조와 그림에는 철학과 기품을 담아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그림을 자기 수양의 방편, 인격도야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깊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래서 원체화 즉 한국화의 전통적인 기법인 채색공필화는 화원 즉 기술자들의 그림으로 폄훼하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조선의 몰락과 일제 강점기로 이어지면서 더욱 강해졌다. 일본의 신 일본화풍 즉 몽롱체 화풍과 일본 남화의 전통은 한국화단의 중심이 되었고 특히 일본이 전통적인 화려한 채색화도 일본에서 수학한 화가들을 통해 새롭게 소개되었고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을 통해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러나 광복 후 한국의 채색화는 삼국시대 이래로 한국의 전통적인 그림의 한 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풍이라는 이유로 외면을 받아야 했다. 여기에는 일제 강점기를 거친 민족적인 감정도 개입되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화단의 주도권 싸움 즉 광복과 함께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운영과 심사권을 차지하려는 화단정치의 결과이기도 했다. 이른바 일제 강점기 선전을 통해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고 화단에서도 일정부분 역할을 했던 이당 김은호와 그 제자들을 제거하기위한 수단으로 ‘채색화는 일본풍’이라는 논리를 동원해서 낙마를 시켰지만 반대세력들은 국전주도권을 차지한 이듬해 김은호는 미술계의 중심으로 복귀한다. 김은호는 일찍부터 후진 양성에 관심을 보이고 후소회를 통해 제자를 많이 배출하여 동양화단에서 단단한 인맥의 소유자였다. 그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의 친일행적과 채색화풍은 좋은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채색화는 전통회화로서의 역사는 간 곳 없고 일본화의 아류이자 일본의 잔재로 치부되면서 이후 그의 제자들조차도 채색화를 버리고 하나둘 담채화로 수묵화로 전향하기에 이르고 점차 조선의 전통회화인 채색화는 그 명맥을 간신히 이어가는 형편이 되었다. 이후 한국화단에 불어 닥친 추상미술과 현대미술 열풍은 채색화는 물론 한국화 전체의 입지를 궁지로 몰아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60년대 초반 전통, 반조형의 기치를 들었던 묵림회는 선염과 발묵을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채색화는 부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여기에 다시 1980년대 수묵운동이 번지면서 채색화의 전통과 기법은 더욱 더 발붙일 곳을 찾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고 궁핍한 가운데 많은 오해와 질시를 견뎌내면서 한국 채색화의 전통을 이어온 작가들이 있어 그나마 오늘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법고창신 
  한국의 전통 채색화는 화원을 중심으로 이어져왔지만 광복이후에는 이당 김은호와 그의 문하인 후소회를 통해 이어져 왔다. 하지만 이들도 일제청산이라는 대의명분에 눌려 채색을 버리고 수묵담채 또는 문인화로 전향하면서 그 맥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박래현, 천경자, 박생광, 조복순이 맥을 이어온 채색화는 산동 오태학과 이경수, 이영수, 류민자, 이숙자, 오낭자, 원문자로 이어졌고 다시 황창배, 김병종, 서정태 등을 거쳐 80년대 초 김선두와 박완용 등으로 면면이 맥을 이어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인 공필 채색화나 채색화의 근간인 석채를 사용한 한국전통채색화의 이념과 기법은 70년대부터 활약해 온 여성미술가들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전통은 새로운 전통의 밑거름이 되지만 현대라는 시대 속에 전통이 함몰되어 나타난 현상처럼 느껴져 가슴 한 쪽이 짠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언제 그 화맥이 끊길지 모르는 전통채색화의 위기론은 어제 오늘 비롯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걱정만 할뿐 누구하나 나서서 전통을, 역사를 오늘에 되살려 새로운 전통으로 이어가려는 노력은 하고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지향(芝鄕) 이숙자((李淑子, 1942~  )의 존재는 매우 독특하다. 쉽고 편한 길을 마다하고 평생을 한국화 그것도 채색화에 매달려 보낸 것도 특이하지만 그동안 이를 강단 있게, 꾸준하게 걸어 온 그의 이력이 작가로서, 교육자로서, 어머니로서, 여성으로서의 삶이라는 모든 부분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는 점에서 귀중하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화업에서도 일정부분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점과 그리고 후학들에게 채색화의 지난하고 어려운 전통과 제작과정을 전해 줄 수 있는 이론과 실기를 겸비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그는 요즘 미술시장에서 거들떠보지 않는 한국화 부문에서 거의 유일하게 인기작가의 반열에 들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의 존재는 매우 흥미로운 것이 사실이다. 
사실 그는 앞서서도 언급한 것처럼 홍익대학교에서 천경자와 박생광 그리고 조복순을 사사사하면서 전통 채색화를 익혔다. 그러나 많은 동기들이 수묵화로 방향을 선회함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채색화의 길을 걸어왔다.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었으나 학생이던 그에게 천경자라는 존재가 매우 크게 다가왔기 때문에 그가 채색의 길을 떠 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에게는 채색화에 어울리는 남모를 뚝심과 끈기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타고난 묘사력은 공필채색화에서도 단연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하긴 이런 여러 조건 때문에 그가 운명적으로 채색화를 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에게 채색화는 일제의 잔재니 왜색이니 하는 지적보다 전통이라는 점 그리고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우리 것이라는 점에 매료되어 학창시절부터 만만치 않은 석채물감 가격이 부담이 되었지만 꾸준히 채색화에 몰두해 왔다. 
그의 초기작은 말 그대로 ‘옛것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즉 옛것에 토대(土臺)를 두되 그것을 변화(變化)시킬 줄 알고 새 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根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데 뜻을 두고 나름의 회화를  완성시키고자 노력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재학 할 즈음 한국화단은 유화나 한국화를 막론하고 새로운 미술운동에 몰입해 있을 때 였다. 해프닝이라는 행위예술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끌어 주간지 지면을 장식하고, 설치미술과 전위적인 사건들이 줄을 잇던 시기였다. 
오직 새로운 것만이 존재하며 가치가 있던 시절 그는 묵묵하게 실기실에서 시대를 잊은 채 채색화에 몰두했다. 그 결과 당시로서는 신인들의 등용문으로 유일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1963년 초 입선하면서 화단에 등단했다. 이후 1980년 제 29회 국전에서 대상을 수상할 때까지 열 두 번의 입선과 세 번의 특선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면서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973년 생애처음으로 신세계백화점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대학진학을 앞두었던 시절 갑자기 부친의 사업실패로 미술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사범학교(지금의 교육대학)에 진학해야 했고 졸업 후 초등학교 선생으로 일하면서 다시 미술대학에 진학했던 화가로서 길에 들어 선 그에게는 정말 감회가 큰 개인전이었다. 당시 그의 작품은 조선여인들의 생활과 관련된 소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단순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재배치하고 재구성함으로서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당시 그의 작품을 원로미술평론가 이경성은 “이숙자가 시도하는 한국화에의 접근은 첫째 채색으로써 화면을 메꾸고 색면과 색면의 대비에서 오는 긴장과 조화를 바랐고, 둘째 이조여인의 향취가 가득한 민예품 및 민속품 속에서 미의 본질을 찾았다는데 있다. 좌우간 현대적 감각으로 다룬 이들 작품은 그의 풍아와 운치로써 이미 과거가 아니고 현재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고 적었다. 
즉 그의 작품은 대상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단순한 세밀화가 아니라 화면에 공간을 구성하고 그 안에 조선시대 아낙들이 사용했던 장신구나 기물들을 교차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전통적인 채색법을 사용하면서도 구성적인 조형적 방법을 택해 평면적인 화면 속에서 새로운 형식과 전통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자아내는 새로운 미감을 드러내는 한편 민속품과 색면의 조화를 통해 영롱한 원색의 색감을 화면 속에서 건져 올렸다. 
이듬해 가진 두 번째 개인전에서 그는 약간의 변화를 보인다. 매우 청량한 빛깔의 꽃들이 화면 가득한 또는 화병에 꽂혀있는 모습으로 마치 이집트 조각상처럼 정면성의 법칙을 따르는 듯 묘사된다. 민속적인 소재를 떠나 다분히 관념화 정형화되어 간다는 느낌과 채색화의 장식적 속성을 즐기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그의 채색화에 대한 집요하고 끈질진 실험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색을 가진 여러 종류의 꽃을 지속적을 묘사하면서 색채의 가치와 투명성, 독자성을 실험함으로서 채색화가로서의 역량을 다지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진달래, 코스모스, 수국, 백합, 목련, 국화, 팬지 등 다양한 꽃 들은 각각의 꽃인 동시에 각각의 색채였던 셈이다. 그리고 대개의 꽃들은 한국화의 전형적인 양식이라 할 공간을 버리고 화면 가득히 묘사되면서 새로운 한국화의 가능성을 실험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간혹 꽃과 함께 여성누드들이 오버 랩 되기도 하지만 이는 화면 구성을 위한 소재로서의 의미가 클 뿐 다른 의미는 크게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즈음 그의 관심은 화면의 구성과 색채 그리고 민예적 소재가 어떻게 한 화면 속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도 각각의 물성을 유지하느냐 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이와 함께 그는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시도한다. 구성적 화면과 입체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성시(盛市)> (227.3 X 181.8cm, 순지에 암채 1970)나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시장(市場)> (153.X210.0cm (120F) 순지에 암채 1972)등은 그의 전통회화를 전제로 새로운 현대적 미감을 조화시키려는 법고창신의 정신이 잘 드러나는 작품들이자 그의 서민, 민초들에게 대한 한없는 관심과 사랑 그리고 연민이 드러나는 작품으로 후에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일하는 여성들, 이브의 전조를 예고한다. 
  
보리밭, 그 생명력 
1970년대 후반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보리밭시리즈를 발표한다. 물론 1973년경 보리밭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1977년 국전에 출품한 청맥(靑麥)을 시작으로 그는 새롭게 화면전면에 보리밭을 가득채운 작품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으로 할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북도 옥천으로 피난을 가 유년기를 보냈던 서울내기 이숙자에게 이 시절 경험은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되고 그리고 후에 그림이 되었다. 그는 보리와 보리가 군집을 이룬 보리밭을 통해 야릇한 추억과 향수 그리고 우리 민족적 정서, 토속적 의미까지 포함하면서 보는 이들의 다양한 감각과 감성을 자극했다. 어려웠던 시절, 허기를 달래주었던 보리, 생각하기도 싫은 보리 고개의 추억, 파릇하게 겨울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생명력, 바람에 일렁이는 대지의 파도, 보리의 낱알이 주는 색스러움, 보리의 꺼칠꺼칠한 잎이 주는 투박한 생명력, 눈부신 푸른 빛, 일렁이는 추수기의 황금빛 이런 모든 요소들이 보리라는 하나의 단일한 소재를 통해 표출된다. 이로 인해 농경사회에 뿌리를 거둔 채 도회의 삶을 택해야 했던 민초들을 추억과 회한의 경계에 관객들을 세움으로써 보리밭은 그에게 화가로서 일정한 반석이 되어주었다. 
사실 당시 보리는 사람들의 귀소본능을 일깨워 주는 소재였다. 어렵기만 했던 시절을 이겨내고 경제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서 황폐화해 가는 농촌은 도회의 삶속에서 닳아가는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산업이 발전하고 도시가 거대화하면서 사람들의 내음새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던 당시에 보리밭은 실생활에서는 생경한 이방이지만 추억 속에서는 친근한 고향 같은 것이었다. 
그는 처음 보리밭을 화제로 접했을 당시를 이렇게 적고 있다. “10여 년 전이었다. 포천에서 교편을 잡게 된 시동생의 하숙집을 둘러 보러갔다가 보리밭을 만나게 되었다.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다 나지막한 언덕등성이에 넓게 펼쳐진 보리밭을 보고 쇼킹한 감동을 받았다. 
보리수염은 초록빛 안개처럼 자욱하게 느껴졌다. 밝은 회청색의 보릿대와 연두 빛 보리이삭 그리고 옆으로 힘차게 뻗은 잎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검은 제비나비가 펄럭거리며 날아가기도 했고 노랑나비, 흰나비가 팔랑이며 날기도 했다.” 당시 새로운 조형언어를 창조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던 그는 보리밭을 발견한 이 날을 1977년 6월 10일이라고 분명하게 기억할 만큼 그곳에서 강한 회화적 영감을 얻었다. 
그리고 이후 그의 보리밭은 이브를 만나게 되면서 푸르고 강한 거칠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한다. 사실 그의 회화는 많은 시간을 요한다. 석채 또는 암채라고도 부르는 전통화법은 많은 시간을 화면에 쏟지 않으면 안 되는 작업이다. 그러다 보니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수년이 걸리기도 하도 소품하나를 완성하는 데도 적어도 서너 달이 소요될 만큼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다른 생각과 소재들이 중첩될 확률이 높아진다. 이숙자의 회화에서 초기 작업에서 보였던 구성적 요소가 이브시리즈에서 다시 나타나고, 보리밭과 이브가 중첩되기도 하고, 또 꽃과 이브가 만나기도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즉 하나의 주제나 기법으로 일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작품을 제작하는 시간이 오래다 보니 그 과정에서 애초의 구상이 변화하는 경우도 왕왕 나타난다. 대개의 경우 작가들은 어떤 한 가지 소재나 스타일에 몰두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른 소재로나 방법을 택하지만 이숙자는 그들과는 달리 자신이 다루었던 소재나 기법들이 다시 나타나기도 하고  중첩되기도 하다가 때로는 한참 뒤에 문득 나타나서 조화로운 화면을 구축하는 경우도 있다.  
그는 보리밭에서 발견한 풋풋한 생명력과 세밀한 묘사를 통해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힌다. 본격적으로 보리밭을 그린 이듬해인 1978년 <맥파(麥波)-청맥> (162.1X130.3cm, 순지에 암채, 1978) 중앙일보사가 주최한 제1회 중앙미술대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내처 다음 다음해 <맥파(麥波)-황맥(黃麥)> (227.3X181.8cm, 순지에 암채, 제3회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장한다. 그는 대기만성이라는 말처럼 같은 해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라는 이름으로 열린 마지막 전시회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한다. 모내기를 하는 여인들이 땀 흘려 일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는 <작업(作業)> (145.5X112.1cm, 순지에 암채, 1980)은 그에게 국전 대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주는 한편 작가로서 나름의 자신감과 용기를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보리밭은 이름 모를 풀벌레나 나비 그리고 달개비 꽃 같은 들꽃들과 만나면서 청아하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작품들로 거듭난다. 그리고 때로는 훈민정음 등 한국의 전통과 만나면서 초기 관심사였던 전통과 함께하는 보리밭을 통해 보리와 우리의 역사, 삶의 끈과 교차시키기도 했다. 또 휘몰아치는 바람을 받아 물결처럼 일렁이는 보리밭 풍경을 그려냄으로서 화면에 동적인 변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보리밭과 이브를 연결 지어 생명을 잉태하는 모태로서의 어머니, 생명을 길러내는 힘의 원천인 대지를 그려냈다면  <백맥-보리밭 사잇길>(1996) 같은 경우 생명의 근원인 여성을 보리밭으로 상징하여 표현하여 마치 보리밭 사이로 난 길이 여성의 성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보리밭은 여성의 또 다른 상징이기도 하다. 

이브, 대지의 어머니 
이숙자의 작품에서 여성은 어머니이자 자연의 원천이자 생명의 근원이다. 그는 규방에 자리 했던 사물들을 소재로 구성적 정물화를 제작하는 한편으로 누드 크로키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는 교육대학을 마치고 다시 시작한 미술대학 진학과 관련이 깊다. 그는 남들보다 늦은 미술공부를 만회하고자 시간 나는 데로, 또 부러 시간을 내서 누드 크로키에 매달렸다, 그의 이런 부지런한 천성은 이미 1972년 경 제작된 <이브-프레지아> (90.0X120.0cm, 순지에 암채, 1972)나 <카나리아-이브>(1973) 그리고 <노란색 새장의 카나리아와 여인>등이 그것이다. 백합이 놓여 진 탁자에 화려한 장식의 가방을 놓고 노란색 카나리아가 노닐고 잇는 새장을 옆에 두고 앉아있는 여성의 모습에서 천경자의 체취가 일견 발견되기도 하지만 천경자의 몽환적, 감성적 분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또 <이브-해변>(1973)의 경우 바닷가에 앉아있는 누드는 관능적 미감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성 본연의 생산성과 모성이 강조된다. 즉 보통의 누드들이 팜므 파탈적 의미를 지니는데 반해 그의 누드는 여성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과 인간으로서 욕망을 감추고 드러내지 못하는 조선시대의 여성이 아니라 남성과 동등한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지지만 <청향(晴香)-꽃집에서>(1975)를 보면 이런 여성주의적 사고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구석이 없지 않다. 
이후 1980년대 들어 다시 등장하는 이브는 꽃과 함께 때로는 관능적으로, 때로는 들꽃과 함께 소박하게, 풍성하고 커다란 꽃과 함께 풍요롭게 나타난다. <이브-수국>(1983), <이브-모란>(1983)이 그것이다.  이즈음 이브는 점차 여성으로서 자신감을 가지고 나타나며 구성주의적인 화면과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추상적인 바탕에 실존적 존재로 등장하는 <추상이브>(1985)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통해 드디어 그의 누드와 보리밭이 한 화면에서 만나게 된다. 이후 1989년경 다시 이브는 그의 화면에 등장한다. 이때의 이브는 꽃과 함께 등장하지만 꽃이 아닌 꽃을 압도하는 누드이다. 1989년 제작된 <리시안시스 이브>나 <고독, 고뇌, 회상, 신비의 이브>(521.2X162.1cm, 1990)의 대작 그리고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처럼 여성의 성기모양을 닮은 카라 꽃이 순백으로 피어있는 <이브-카라>(1991) 등이 그것이다. 이즈음의 이브는 남성적 시각이 아닌 여성의 입장에서 본 여성의 관능미가 강조된 여성으로, 자아를 실현하고자하는 여성작가로서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후 보리밭과 누드가 만나 <보리밭과 이브>로 완성되면서 그의 여성주의적 태도 즉 페미니즘적인 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간 한국미술에서 나타난 누드나 여성상은 순종적인 이미지의 여성이었다. 또 누드의 경우 남성적 시각에서 바라본 여성으로 천연의 여성누드라기 보다는 관능미와 성적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런 여성의 모습이었다. 따라서 과대하게 가슴이 강조되거나 둔부가 발달한 그런 여성, 때로는 남성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몸매를 지닌 팔등신 또는 팔등신 반의 종속적인 여성상들이 대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숙자의 누드는 결코 풍만하다고는 할 수 없는 때로는 혐오감이 들 정도의 보통의 여성, 관념이나 성적으로 포장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여성의 모습으로 화면에 등장하면서 일상적인 누드화와는 거리를 두었다. 게다가 과감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성의 누드는 여성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신의 욕망을 감추고 절제하는 규방의 여인이 아니라 건강하게 성을 즐기고, 종족을 번식시키는 세상의 절반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는 당당하고 건강한 모습이라는 점에서 투박하지만 건강하고 꾸밈이 없는 여성의 모습으로 거듭난다. 이제 여인이 아닌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거듭나려는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이브의 보리밭89>(1989)으로 이어지면서 보리밭에 누드와 이름 모를 흰 야생화 한 두포기가 서정성을 더하는 동시에 끈끈한 생명력을 암시한다. 이런 시각적 보완재는 <이브의 보리밭>(1990)에서 등장하는 보리밭과 누드 그리고 화면 구석에서 던져지듯 피어있는 붉은 꽃 두어 송이가 시선을 끈다. 이렇게 그의 보리밭과 이브 시리즈는 파격이자 도발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화단의 내외로부터 많은 칭찬과 질시를 한 몸에 받아야 했다.  
당시 여성작가가 여성을 소재로 남성들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는 일부의 지적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숙자에게 누드 즉 이브는 조선시대 이후 이 땅의 여성들을 짓눌러 왔던 굴종의 사슬을 끊어내는 작업이었다. 일찍이 자신의 회화를 통해 자신의, 여성의 해방과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시도한 것이다. 여기에 보리밭과 이브는 마치 민화처럼 역사의 바탕을 이루는 서민과 상것들의 건강한 욕망, 부끄러움 없는 본능으로서의 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옛날 물레방아간과 보리밭은 애욕이 아닌 남녀의 본능적 정욕을 해소할 수 있는 용인된 장소였다. 따라서 요즘도 물레방아간이나 보리밭은 정사장면을 상상하게 하는 조상 전래의 민담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 사회가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발전했다 하지만 수 백 년 동안 축적되어온 풍습이나 전통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런 때문에 요즘에도 보리밭은 은밀한 남녀 간의 밀회를 상징한다. 그러나 보리밭이 지니고 있는 소박한 관능성은 음탕하거나 어두운 것이 아니라 밝고 힘차면서 건강하고 은근한 ‘서로가 알면서도 슬그머니 웃어줌으로서 묵인되고 용인되는 해학이 있는 성이다. 거기다 그의 회화적 역량이 돋보이는 것은 보리밭을 이루는 보리이삭들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묘사하면서도 완성된 작품에서는 전체적인 변화가 흡사 파도처럼 일렁인다거나 빛의 변화에 따라 보라와 청색을 오가는 색의 변주 그리고 명암의 굴곡은 그가 세부를 보면서도 언제나 전체를 놓치지 않고 넓은 시각으로 작품을 대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부분적으로는 세밀하게 보리와 이브의 체모에 이르기 까지 정말 섬세하다 못해 정교하다고 할 만큼 정성을 다해 그리고 있다. 

이숙자, 더 보기 
그의 회화가 갖는 조형적 특성을 살펴보면 구성주의적인 화면조성과 정갈하고 투명한 원색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또 대상을 표현함에 있어서 완벽하게 사물의 특징을 잡아 정교하게 형태를 잡고 그 위에 석채를 사용해서 채색하는 색채의 완벽한 구사가 특징이다. 하지만 그의 화면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것 중 하나는 한국화의 전통인 공간을 비워두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는 전면성이다. 그의 초기작들은 정물화가 대종을 이루지만 정물이 화면에 자리하는 방식이 매우 평면적이다. 색면 구성처럼 면과 색이 강조된 화면은 공간감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이후 보이는 많은 다양한 소재를 다룬 작품에서도 이런 경향은 여전하다. 보리밭은 화면 그득하게 넘실거리고 때로는 누드가 등장하지만 여전히 화면전체에 여백은 없다. 
그의 이런 회화적 특성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사실적인 한국화의 채색화 전통을 고수하고 고집해오면서도 조형적으로는 현대화된 새로운 미감을 통해 한국의 채색화를 새롭게 갱신하고자 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는 회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일련의 추상충동을 매우 슬기롭게 채색화의 특질과 연결시켜 새로운 장을 열어갔다. 
  이렇게 자신의 회화에 모더니티를 담아내고자 하는 노력은 그의 법고창신하려는 태도와도 맥을 같이한다. 그는 다양한 실험과 시도를 통해 모더니티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런 그의 시대에 맞는 전통을 추구하는 태도는 그의 초년 작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9명의 수녀들이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기원1>(167.0X223.0cm, 순지에 암채, 1977-1978)은 모더니티와 평면성이 유연하게 교차하면서 정갈한 화면을 구성한다. 비둘기들이 화면하단에 위치하고 모든 수녀들이 어느 곳을 향해 시선을 주고 있지만 묵주를 든 수녀만 시선을 관객을 향해주고 있다. 낙원에서 사과를 따 먹고 인고의 고통으로 자식을 생산해야 할 업보를 진 이브의 전형처럼 그 수녀는 우리를 보고 있어 연민을 더해준다. 이렇게 그의 화면에서의 군상은 1982년 다시 나타난다. 물론 보리가 군집을 이루는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라 크게 관심을 끌지 못하는 듯 하지만 실은 이런 그의 군집화, 군동화는 보리밭의 모체이지 원형인 동시에 새로운 보리밭을 실험하는 축을 이루기도 한다. 또 시대를 초월해서 자신의 입신에 관심을 가지던 많은 화가들의 탈속적인 경향과는 달리 그는 세간의 사람살이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어찌보면 사람에 대한 배려와 사람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자신을 향한 열정이 이브를 탄생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암울했던 80년대 초 교정에 삼삼오오 몰려있는 교련복을 입은 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캠퍼스-훈련생> (210.0X152.0cm, 순지에 암채 1982)는 이런 시대의 아픔을 우호적으로 회화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민중미술이라는 대중의, 민초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사람들의 기본권에 대한 관심에 편승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던 이들과는 달리 사람과 사회에 대한 어머니 같은 이해와 포용력은 그를 캠퍼스에서 가치와 현실 속에서 고민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통해 은유적으로 상징적으로 시대의 정신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하나가 아닌 여러 사람의 여망과 관심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보여주려는 한편 혼자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버거운 과제를 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화면에서 단순하게 하나의 회화적 요소로 은닉하면서 그들의 의식저변에 깔려있는 저항의식들을 감싸않는다. 이런 그의 거부할 수 없는 시대를 보는 눈은 의식 있는 작가로 살아왔음을 방증한다. 이런 80년대의 군부독재시절, 소위 민중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사람들 뿐 만 아니라 소위 의식화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도 분노하고 절규하던 시절, 그도 그렇게 지식인의 한사람으로, 어머니로, 교육자로 행동하고 실천했다. 그의 민예품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민초들로 이어졌다. 어렵고 힘든 농사일을 하는 여성들이 화면에 등장하면서 사람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일하는 여성의 고됨을 너무나 잘 아는 그로서는 농번기철 논에 모를 내는 여인들의 삶이 얼마나 찐하게 다가왔겠는가. 
이런 이유로 제작된 작품들 중 하나가 그를 국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게 해준 <작업>(1980)이다. 하지만 이후 여인 삼대가 사월 초 팔 일 날 연등아래서 소원을 비는 모습을 담은  <기원(祈願)> 145.5X112.1cm, 순지에 암채, 1981)나 성가를 열심히 부르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을 다룬 <성가>(1982) 그리고 비옷을 입고 모내기를 하는 노동하는 여성을 그린 <작업>(1982)등은 그의 일하는 여성에 대한 연민과 사랑인 동시에 이브시리즈와 보리밭과 이브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주장할 여성들의 탐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군집시리즈 중 독특한 것은 소(牛)를 그리고 있는 대형작품인 군우(群牛)시리즈이다. 1987년 제작된 <군우>는 크기가 454.6X181.8cm에 달하는 대작이다. 여기에 그려진 소는 그의 짧았던 기억이지만 삶의 중요한 게기가 되었던 시절의 기억을 토대로 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소들은 서로 살을 맞대고 비비면서 화면 가득히 가득 찬 모습으로 서있다. 여기서 소는 순한 민초들의 모습일 수 도 있고 역사의 수레바퀴아래서 묵묵하게 삶을 일구어 가는 소박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렇게 군집을 이루는 소들은 하나의 균일한 화면을 이루면서 소라는 실체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조금 관심을 두고 보면 이내 소를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그는 화면의 전면성을 이용해서 사실적인 작품의 속성을 조금은 누그러뜨리면서 사고하고 조응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간다. 이런 구성적이고 전면적인 회화적 특징을 보이지만 좀체로 드러내지 않는 그의 이런 미술에 대한의지와 모더니티에 대한 생각은 결정적으로 <군우 -얼룩소> (363.6X227.3cm, 순지에 암채, 1987)에 나타난다. 사실적인 방식으로 얼룩소들을 그리고 있지만 철저하게 명암법을 버리고 면만으로 화면을 구성함으로서 추상적인 동시에 구상적인 이 작품은 그의 화가로서 전통 채색화가로서 그리고 시대정신을 실천해야하는 실천가사에서 적절하게 자신을 포지셔닝하고 있다. 마치 앤디 워홀의 컴프라치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그의 회화에서 도드라지는 한 점의 작품인 동시에 그가 고민해온 전통과 시대정신의 통합과 실천이라는 명제에 적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작품이다.  
우리는 이숙자를 단순하게 보리밭과 이브만으로 단정 짓는다 하지만 그의 북한여행을 통해 제작된 작품들이나 엄청난 양의 크로키 그리고 군우 시리즈와 일하는 여인들 시리즈는 이숙자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그의 대작 <백두산>(227.3X1454cm,1992-2001)은 압권 중의 압권이다. 그의 백두산은 그의 작업이 요하는 절대적인 시간을 쏟아붇고서도 완성하기 힘든 역작이다. 또 대작이라고 해서 그냥 평소 그리던 소재를 크기만 크게 벌려놓은 것이 아니라  14.5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화폭 속에 형상들이 어느 것 하나 치우침 없이 제 자리에서 제 몫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보리밭이 세부에서는 이를 데 없이 정교하고 세밀하지만 화면 전체를 놓고 보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물결처럼 율동과 정지가 한 호흡으로 드러나는 것과 같이 그 장대한 화면에서 민족의 영산 백두산도 우리 앞에 현현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숙자에게 부여된 지금까지의 도식화된 이미지를 벗겨주어야 한다. 이숙자는 전통을 전제로 하지만 그 전통에 함몰되지 않는 모더니스트이자 과격하고 정치적인 여성해방론자가 아닌 조용하지만 자신의 삶과 앎을 통해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실천하는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게다가 타고난 모성으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보듬어 안고 쓰다듬어 줄줄 아는 천상 어머니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의 이런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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