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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희-서윤희와 한국 현대미술가의 만남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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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영-몽상, 심층, 그 확장적 지평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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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환-이브의 보리밭의 에로티시즘
김광명 평문

서윤희-서윤희와 한국 현대미술가의 만남 6



한국화가 이숙자와 19c末 일본주의 영향하의 인상주의 화가 고흐, 보나르

들녘에 출렁대는 보리밭! 거친 겨울의 모진 바람을 견디고 이른 봄 사람들의 발에 밟히면서 굳굳히 세상에 나와 결실을 맺는 보리의 모습은 거친 역사의 파도 속에서 힘겹게 몸부림쳤던 우리 선조들의 몸짓을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보리밭이 어떤 이에게는 사랑을 나누는 장소로, 어떤 이에게는 어려웠던 때에 우리의 배고픔을 덜어 주었던 고마움의 대상으로 생각될 수 있겠지만 필자에게는 한 많은 우리의 역사를 연상시키는 곳이다. 
'보리밭'으로 널리 알려진 한국화가 이숙자의 작품들은 장르상 채색화에 속하는 관계로 1960~80년대 다른 한국채색화들과 함께 미술사에서 우리에게는 잊어 버리고 싶고 또 벗어나고 싶은 일본과의 관계, 즉 일본화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는지 하는 의혹을 받는바 있었다. 일반적으로 세계 미술사에서 한 나라가 이웃하고 있는 다른 나라로부터 오는 예술에 있어서의 영향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었다. 만약 15C 이태리 르네상스 건축이나 조각이 없었다면 영국의 아름다운 건축물이나 프랑스의 로뎅(Auguste Fodin)과 같은 조각가가 과연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하였을 때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영국이나 프랑스인들도 건축이나 조각의 분야에서 이태리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에 대하여 자연스럽고도 다행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유럽 경우와는 다르게 이웃나라 일본으로부터 오는 어떠한 영향에 대해서 달가워하지 않는데, 그것은 역사적으로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많은 침략을 함으로써 한국인의 마음에 달갑지 않은 이웃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나 관습뿐 아니라 예술에 있어서도 두 나라는 여러 가지 공통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어느 한편으로부터 오는 일방적인 영향일 수도 있고, 두 나라 예술이 있어서 공통적이고도 비슷한 요소 때문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 대하여 우리는 이웃하고 있는 동양의 다른 나라 일본 미술과 한국미술의 특성에 대하여 편견 없이 알아야 한다고 본다. 

필자가 이 글은 쓰는 것은 19C말 유럽과 미국에서 구미인들의 많은 찬사를 받았던 일본주의를 통해 동양의 어떠한 미적 요소가 그들에게 그토록 이국적(exotic)이고, 새로운 것인지를 알아보고 한국의 대표화가 이숙자의 작품에 나타나는 동양적이고도 한국적 요소를 그것들과 비교하므로 일본과 한국미술의 차이를 살펴봄과 나아가서는 우리 미술이 국제 미술계에서 어떠한 가능성이 있는지도 생각해보기 위함이다. 그리고 필자가 이 글에서 이숙자의 비교대상으로 일본과 관계 있는 프랑스인상파 화가를 선별한 이유는 해방 이후 역사적으로 많은 화제에 올랐던 채색화와 일본화의 연관성에 관한 글들을 읽으면서 누군가의 글에 의해 일본화와 한국 채색화의 차이점에 대하여 비교분석작업을 하므로 일본화와 다른 우리의 채색화가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규명하여 채색화가들이 지고 있는 일본화에 대한 부담을 덜어야 하는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작가 이숙자의 1973년 신세계화랑에서 있었던 1회 개인전에 전시되었던 작품들을 보면 작가의 화면에 나타나는 색채가 한국 고유의 전통의상이나 민예품(5방색)같은 곳에서 연유하였음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그녀가 한국의 채색화가로서 출발점이자 그녀의 색의 원류를 분명히 하는 시점이 되었다. 그 후 1977년까지 꽃, 나비, 전통가구, 동물 등의 소재로 때로는 환상적이거나 시적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강렬하면서도 여성적인 색채로 많은 소작들을 그렸는데 필자의 시각으로는 다양한 채색화를 실험하는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 1기)  1977년 6월 포천에서 감명 깊게 바라본 보리밭에서 작가는 ‘조상들의 슬픔의 정서’와 어려웠던 지난날 ‘서민의 애환과 삶’ 그리고 밟으면 밟을수록 굳게 올라오는 보리의 생태에서 ‘한민족의 끈질긴 민족성’을 발견하는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하여 보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기법의 작품에 몰두, 훗날 ‘보리밭의 작가’라는 별명을 갖게 된다. (제 2기)
1984년부터 1988년 동안 화면에 보리와 소(牛)로 함께 다루어 많은 대작을 제작하고 (제 3기) 1985년부터 89년까지는 보리와 여성의 누드를 따로 그리다가 1990년에 이르러 보리와 누드가 결합, ‘이브의 보리밭’ 시리즈가 탄생되었다. (제 4기) 1995년부터 현재까지는 다양한 한국문화의 상징물과 보리를 혼합한 새로운 양식을 통해 또 한번의 시도를 하고 있다. (제 5기)

이 글은 이숙자의 작품세계와 일본주의의 영향하의 인상파 화가에 초점이 맞추어 있으므로 우선 한국과 일본이 서로 교류하였던 미술에 관한 역사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교류에 관한 역사를 살펴보면 AD 6C~8C사이 한국 쪽에서 먼저 영향을 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AD579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위덕왕(威德王)의아들 아좌태자는 일본의 쇼오토쿠태자의 스승이 되어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그 작품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전문가 사이에 그 진위여부가 논란의 여지로 남아있는 상태이다. 
AD 610년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의 화가 담징은 먼 이국 땅 일본에서 조국 고구려가 수(隋)나라에 이긴 소식을 듣고 감격하여 부처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법륭사(法隆寺) 금당에 사불정토도(四佛淨土圖)를 그렸는데 당시의 일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앞선 미술기법을 선보여 그들을 감탄케 했다는 사실로 유명하다. 고구려의 화가 가서일(?~?)은 나라시대(7C~9C) 법륭사의 천수국수장(天壽國繡帳)의 밑그림을 그렸다. 천수국수장은 일본 최고(最古)의 자수인데, 621년 일본의 태자 쇼토쿠(聖德)가 죽자 이듬해 태자비의 요청으로 현재 중궁사(中宮寺)에 일부만 남아있다. 그 외에도 많은 한국의 예술가들이 일본에서 활약, 미술에 많은 공헌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연구발전 시켰는데 8C 나라시대에는 중국의 당나라로부터 불교미술을 받아들여 화려하고 장식적인 스타일로 자국화하기 시작, 국내에서 인기를 얻었다. 9C~12C에는 중국의 양식이 서서히 장식적인 일본양식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였으며, 12~14C에는 에마키 라고 하는 두루마기그림이 전성기를 이루고, 13~16C에는 중국의 수묵화 스타일을 받아들여 일본 특유 스타일로 그리다가, 16~17C 소타즈와 코린파의 화려한 장식적 병풍화가 유행하였고, 18C에는 서양미술과 만나면서 또 다른 발전을 한다. 이러한 일본의 양식이 일본통치하의 鮮展(1922~44)을 통하여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선전을 통해서 영향력이 컸던 기법인 윤곽이 뚜렷하면서 색채를 진하게 사용하는 농채(濃彩)위주의 대가(大家)에는 京都派의 山元春學(1871~1933), 院展의 멤버였던 寺崎廣業(1866~1919), 下村觀山(1873~1930) 등이 있었는데 한국의 화가들의 그들의 영향을 직, 간접으로 받았다. 19C중반부터 구미에 널리 유행하였던 자포니즘의 원류를 살펴보기 위해 1867년 도쿄 국립박물관의 기록을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되는데, 그 당시 일본은 파리 세계박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막부(幕府)정부가 주문한100장의 판화를 선별하기 위해 당시의 판화작품을 정리하면서 50장은 일본생활을 묘사하는 작품들로써 선별하고, 또 다른 50장은 에도의 풍경을묘사한 작품으로 분류한 후 나머지는 유흥가를 소재로 하는 향락적이고 저질스런 삼류작품이라 하여 박람회가 끝나고 처분해 버렸는데 (심사위원들은 대부분 당시 일본미술의 대가들이었다.) 그런데 이 처분된 판화작품들이 파리의 미술계에 유입되면서 서구 미술계에 일본미술이 본격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어 대단한 반응을 일으키게 되었다. 서구인들은 그것들을 '일본의 계시'(Japanese revelation)라는 말로 극찬하면서 선호하였는데 일본에서 배척당한 미술이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에게 그토록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된 것은 아이러닉 하면서도 교훈적인 얘기다. 
자포니즘(Japonisme)이라는 용어는 1872년 프랑스의 비평가, 판화제작가, 미술수집가였던 필립 뷰르트(Philippe Burty)가 처음 만들었으나 20C이 이르러 많은 미술사 학자들에 의해 Japonaiserie 또는 Japonerie라는 용어로 그들의 미술작품에 있어서 일치의 일본적인 대상이나 물체를 묘사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통용된다. 유럽 미술계에 영향을 미친 자포니즘은 구체적으로 16~ 19C 풍속화(風俗畵)와 우키요에 판화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우끼요에판화의 경우, 시대적 배경이 무로마치 말기 상공계층의 부상으로 대도시가 발달하여 대중들의 생활이 윤택해지고 도시에는 쾌락추구의 성향까지 생겨 도시의 유락가(遊樂街)가 날로 번창하였는데 그러한 풍경은 화가들에게 그림의 좋은 소재를 제공하게 되어, 실재로 우키요에 판화의 주된 영감의 근원은 카부키(歌舞伎)극장과 요시하라(吉原)의 유흥가였다. 풍속화에서부터 발전한 목판화의 기법은 흑백만으로 사용하는 기법에서 밝고 눈에 띄는 색채를 원하는 대중의 요구에 부응, 중국의 다색 판화기법을 참작하여 점점 더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는 기법을 만들어 우키요에 판화의 특징인 호소력이 강한 시적인 느낌과 함께 생생하고 개성이 넘치는 화질을 만들어내었으며 18C이후에는 서양의 화풍에 영향을 받아 풍경화 부분에 많은 수작(f秀作)이 탄생되기도 하였다. 유럽이나 미국의 예술작품에 나타나는 일본화적 요소는 대단히 복잡하고 방대하나 여기에선 그 영역을 구미의 회화에만 한정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1860~90년대 프랑스의 경우를 보면 드가(Edgar Degas: 1834~ 1917)의 그림이나 로트렉 (Henri de Toulouse-Lautrec, 1901)의 포스터 작품에 나타나는 비대칭구도나, 마네 (Edouard Manet: 1832~83), 휘슬러(James Abbott Mcneil Whistler: 1834~ 1903), 고흐(1853~90), 고갱(Paul Gauguin: 1848~1903) 그리고 나비파(The Nabis)의 원색인        사용된 평면적 화면과 선 또는 짙은 색의 윤곽선이 자포니즘의 영향인데, 그 중에서 동양의 서예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는 선에 강조를 둔 양식의 보나르(Pierre Bonnard : 1867~ 1947) 나 뷔얀츠(Edouard Vuillard : 1868~ 1940)가 있다. 
영국의 경우는 그 당시 예술공예운동(Arts & Crafts Movement)이 일어났던 때였으므로 회화와 응용미술작품에 일본화의 영향이 동시에 융합되어 나타났었는데 비어드슬리(Aubrey Beardsley: 1872~98)의 디자인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선이나 구도가 그것이고, 회화 작품에서는 전기 라파엘화파(Pre-Raphaelites)의 로제티 (Dante Gabriel Rossetti : 1828~82)의 작품에서 윤곽선이 강조되거나 여인을 다루는 소재면 에서 일본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에는 라 파지(Jone La Farge: 1835~ 1910), 카샤트(mary Cassatt: 1844~1926) 등의 작품에서 비슷한 경우가 재연되었다
이중에서 프랑스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던 고흐와 보나르를 작가 이숙자의 비교대상으로 꼽은 것은 그들이 다른 작가들과 비교하여 가장 동양미술의 회화적 요소에 영향을 받았고 소재상으로도 유사성이 발견되어 이 글에서는 그들과 이숙자의 색채와 표현기법을 중점으로 논하기로 한다. 
 고흐는 후기 인상파 화가 중에서도 대표적인 화가이며 세계적으로 어린이부터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유명한 화가임과 동시에 한국에도 그의 품에 있어서 많은 애호가를 갖고 있는 화가이다. 선교사로 일하다 직업을 바꾼, 미술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으나 누구도 그의 천재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러한 고흐의 화풍이 동양미술에 의해 많은 영감을 얻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한국에서 그의 그림이 더 사랑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영향을 준 나라는 일본이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다. 일본이든 중국이든 편견 없이 우리가 동양의 것을 소중히 생각하는 날이 왔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고흐는 일본판화에 대단히 매료된 화가였는데 그의 동생 테오에게 건넨 편지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일본의 목판화를 보면 일본에 있는 것 같다. 네가 일단 그것들을 좋아하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야…이러한 단순한 일본의 것이 나에겐 거의 종교와 마찬가지란다" (You know, here I feel myself to be In Japan. Japanese woodcuts, when once you love them, you never regret it…what these simple Japanese teach us almost amounts to a religion: 1937년 Goerges Philippart가 파리에서 편집 발표)라고 쓰고 있다. 

일본의 국보 중에 하나이며 일본 동경 네즈 미술관에 있는 오카다코린(尾形光琳1658~1716)의 <연자화도병풍>은 금지 배경에 파란색의 활짝 핀 붓꽃을 그린 것으로써 1700년 근방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코린은 쿄토의 황실과 귀족들에게 직물을 공급하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아버지도 서예와 그림을 그릴 정도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최신의 유행과 디자인에 보조를 맞추고 살았던 인물이었다. 고흐의 작품 <붓꽃(Irise)>은 1889년 생 레미에 소재한 정신병원의 정원에 있었던 꽃을 그린 것으로서 그의 말년의 작품인데, 코린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보이며 색채와 묘사기법 그리고 선에 있어서 일본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다. 일본화의 농채(濃彩)기법을 연상시키는 화려하고 강한 색채와 많은 선을 사용하는 붓 터치의 기법은 동양화에서 우리가 많이 보아왔던 사물을 선으로 묘사하였던 기법과 일치한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말년에까지 일본화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의 예술적 개성이 상당히 동양적인 것에 근접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의 화가 이숙자의 1977년 <청향>은 그녀의 초창기 작품으로써 동양화의 시각으로 보아 코린이나 고흐의 작품과 함께 유사성이 발견된다. 원색이면서 단색으로 처리된 뒤 배경, 전체적인 화면에 광선의 처리가 되지 않고, 꽃들도 비현실 속의 형상들이고 잎사귀들도 반복적으로 패턴화되어 있는 것은 코린의 작품과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사실적으로 서로 다르게 묘사된 이숙자의 꽃과 거의 패턴화되어 있는 코린의 꽃의 스타일이 다르고, 잎새를 묘사한 방법에 있어서 코린의 잎새는 동양화의 난을 그리는 전통적 스타일인 반면 이숙자의 잎새는 오히려 서양화에 가까운데 그것은 17C와 20C의 시대적 차이로 인해 이숙자의 붓꽃에는 서양화의 요소가 함께 공존하기 때문이다. 
고흐의 또 하나의 작품 <양귀비와 종다리가 있는 밀밭 (Edge of a Wheatfield with Poppies and Lark), 1887년>과 이숙자의 1994년 <황맥>은 비슷한 구도와 소재의 흥미로운 작품들인데 묘사하는 기법에서 유사성이 발견된다. 고흐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밀밭을 표현하는데 쓰여진 가늘고 짧은 붓 터치는 고흐의 작품뿐 아니라 다른 인상파화가 (피사로 같은)에게서 자주 발견 된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볼 때 일본화에서 영향 받은 동양화의 선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숙자의 '보리밭'시리즈에서 많이 쓰려진 가느다란 세필 묘사 또한 분명한 동양화의 원류를 둔 기법이므로 고흐의 밀밭과 이숙자의 보리밭에서의 작은 붓 터치들은 스타일은 달라도 사물을 선으로 묘사했던 동양화의 근원을 둔 기법들로 본다. 보나르의 색채는 고흐처럼 강렬하지는 않지만 그의 구도나 장식적인 스타일은 일본적 화면을 연상시킨다. 보나르의 친구들도 그를 가리켜 ‘대단히 일본적인 나비파’(Nabitres japonard)라고 불렀다. 1891-~2년 작품 <가리개용 네 폭 패널화(For Panels For a Screen>을 보면 입체적 정확성보다는 장식적인 문양을 강조하고 심지어 무늬가 접히는 부분에서 조차도 선을 그대로 사용하는 일본화(목판화)에서 유래된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세기말적인 퇴폐적 요소가 돋보이고, 그림자나 사물의 후퇴도 없는 분위기 위주의 묘사만 강조되었다. 한국의 작가 이숙자의 작품에서도 같은 양식이 재현된다. 이숙자의1988년 <이브> 경우는 그러한 무늬가 한국 건축의 단청무늬나 옛 벽지의 연속무늬에서 착상을 얻은 것으로 보나르의 단순한 무늬보단 훨씬 복잡한 패턴의 무늬로 되어 있다. 이러한 이숙자의 장식무늬는 확실하게 일본주의와는 다른 것 들이나 색채묘사 위주의 반복적이고도 장식적인 무늬를 많이 사용했다는 원칙은 공통적으로 흡사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보나르의 그림에서 살펴보았던 요소들을 17C 중엽 일본풍속화 <도수유락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기모노의 무늬에서 단순한 원, 직선 그리고 체크무늬를 확인할 수 있고, 그 외 인물의 배경에서 금분이 뿌려진 것과 보나르의 인물 배경의 붓 터치 스타일이 동일하다는 것도 볼 수 있으며, 인물을 자르지 않고 먼 곳부터 발끝까지 Full size로 그려진 주요한 특징들도 눈에 띤다. 이제부터는 일본의 <도수유락도>와 한국의 작가 이숙자의 1988년 작품<고찰>을 보면서 차이점을 살펴보면, 우선 색채에 있어서 일본은 색채가 그다지 강렬하지 않으며 원색보다는 색을 혼합하여 많이 쓰여졌고 금분을 사용하여 다소 화려해 보이는 반면, 한국은 색채가 혼란스러움을 느낄 만큼 색의 대비가 강하고 채색에 있어서 물감 이외의 것은 사용되지 않았다. 선호된 색상도 일본은 황색 계통이 화면에 많이 등장하나, 한국은 빨강이나 파란색, 그리고 그 중간색이 화면에 많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장식적 문양은 일본은 주로 기모노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 패턴이 단순한 반면, 한국의 <이브>는 배경에 문양이 많이 나타나며 <고찰> 에서도 단순한 원이나 직선무늬 같은 것은 없는 일본의 것보다는 복잡하고 스타일도 다르다. 일본의 <도수유락도>에서 배경이 금분으로 단순히 처리된 반면 오히려 한국의 <이브>에서는 배경이 복잡하게 처리되었다. 구도에서는 일본은 수직의 서있는 Full size의 인물이 많은 반면, 한국은 수평으로 누운 몸의 일부만 화면에 나타나는 구도를 갖고 있고, 물체의 그림자는 일본과 한국에서 공통적으로 찾아 볼 수 없다. 위의 사실을 종합하여 볼 때 이숙자와 19C 유럽과 미국에 유행했던 자포니즘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색채, 선, 장식을 작품의 어떠한 요소로 보느냐에 관한 것이다. 공통이 되는 것은 색채에서 프랑스 인상주의에서의 밝고 아름다운 색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 이숙자와의 두드러지는 유사점이며, 선은 사물을 구분 짓기 위한 윤곽선이나 사물을 선으로 묘사하기 위한 용도로 쓰여졌는데 이것은 동양화의 전통적인 기법과 유사점이 있다. 장식에 있어서는 회화에서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어 사물을 입체적 대상이 아닌 장식의 대상으로 보아 사물의 깊이나 후퇴도 없고, 그림자도 중요시 되지 않는 시각으로 처리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선의 중요성이 강조된다는 점과 대상(사람, 물건)을 현실이 아닌 비현실의 대상으로 여겨 그림자를 생략하거나 입체인 미가 아닌 평면적인 대상으로 보았다는 것인데 그것은 전통적인 동양화의 시각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차이점은 일본과 한국의 선호하는 색과 색의 농담에 차이가 있고, 한국의 선은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묘사에 치중하는 반면 일본의 선은 더 장식적이고 더 스타일화 되어 있다. 문양에서도 한국에서는 복잡한 문양이 선호되고 배경묘사에 치중되는 반면에 일본에서는 대부분 단순하고 기모노 같은 의복에 치중된다. 
그러므로 작가 이숙자는 한국의 건축이나 민예품에서 영향을 받은 화려한 채색기법으로 한국의 정서를 여성의 입장에서 사실적으로 묘사한 1970~90년을 대표하는 한국화가로 평가한다. 

필자가 이 글에서 논한 내용은 일본의 17C중엽부터 18C초 풍속화와 한국의 20C후반 이숙자에 관한 것으로 한정했으나 앞으로 일본화와 한국화에 관한 것들을 좀더 폭넓게 다루어 한국화와 일본화의 차이점을 확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고대 미술사의 아좌태자, 담징, 가서일 등이 일본에서 유명한 작품을 한 두 개 남기므로 막연히 일본에 한국미술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보다는, 좀더 깊이 있고 구체적인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 한국출신의 화가들이 어떤 미술(양식, 구도, 색채 등)을 일본에 전하였으며, 일본의 어떤 화가들이 그들의 미술을 전수 받았으며, 어떤 스타일로 발전시키고, 그들의 후예는 어떤 화파의 어떤 화가들이 되었는지 그것에 관한 자료와 증거까지 확보되어야 만이 그 영향의 전개과정이 명확하여 진정으로 우리가 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역사가 입증된다고 본다. 물론 고대 역사에 관하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가정과 가설을 통한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러한 연구와 자료들에 대하여 많은 관심과 열정이 있어야 하며 이 부분이 일본미술에 대한 한국미술의 자신감과 긍지를 높일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식 해야 한다. 그리고 조선후기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이후, 한국화 스타일이 일제시대를 전후하여 어떻게 변천되었으며 변화된 내용이 일본화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19C후반에서 20C중반으로 오래 전의 일이 아니므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단순히 채색화를 한다는 이유로 지난 몇 십 년 동안 한국의 채색화가들이 일화화와 연관이 있다고 의심을 받아왔다는 것은 한국의 미술사 연구가 대단히 부진 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필자가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은 한국화와 일본화의 개성과 특질을 확실히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리 그림을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대상으로 높은 안목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제의 개성이 오늘 그리고 내일의 개성으로 영원할 수는 없다. 어제는 일본의 것이었지만 내일은 한국의 것이 될 수 있다. 한가지 특성이 일본미술에 많이 등장하였다 하여 그것을 일본의 것으로만 규정, 한국의 작가들을 나무라는 것은 잡초를 뽑으려다 알곡까지 뽑는 경우가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화가들로 하여금 그들이 많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넓고 높은 안목으로 그들의 가능성을 믿으며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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