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오광수-환상과 리얼리티

오광수-환상과 리얼리티



수업기의 채색화 영향과 소재 취향
이숙자의 작품을 연대별로 일별해 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전개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초기엔 극히 일상적인 생활주변에서 취재된 모티브를 다루다가 점차적으로 환상적인 톤의 강화로, 종래에는 현실을 초극하는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음이 그 하나다. 현실적 대상에서 점차 초현실적 분위기로 이동해 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더욱 풍부한 색채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환상적인 요소라든지 초현실적 감각이라든지 하는 내역을 구체적으로 뒷받침 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풍부한 색채구사란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초기 현실적 대상의 작품에서도 이미 구성주의적 시각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이 후기로 가면서 더욱 구체화되고 다양해져 종래에는 대상을 구성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구성주의 적 틀 속에 대상을 끌어 들이는 양상으로 전개를 보여준다는 것이 두 번째다. 바로 이 같은 두 개 의 전개국면이 다름 아닌 이 작가의 작품세계의 구체적인 내용이 되는 셈이다. 
한 예술가의 형성과 성장의 배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몫은 역시 교육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숙자의 경우도 이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의 미술수업은 홍대에서 이루어졌다. 그가 미술학교에 적을 두었던 60년대 후반의 홍대 동양화과에서는 채색 위주의 작업이 가장 활기를 띠었다. 당시 교수진이 천경자를 비롯해 박생광, 조복순 등 채색 위주의 작가들이었다. 이숙자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교수는 천경자였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이 무렵에 홍대에서 수학한 동양화가들 가운데 채색화가가 많다는 것도 이런 사정에 기인한다. 미술학교의 분위기란 담당교수의 체취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비단 홍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미술학과에도 적용된다. 예컨대 서울대의 김용준, 장우성에 의해 다져졌던 초기의 분위기가 아직도 진한 체취로 이어지고 있는 것도 좋은 예이다. 이숙자의 경우, 천경자의 영향은 단순한 채색 위주의 방법 뿐에서만 아니라 소재적 취향에서도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특히 꽃과 여인 소재적 취향은 여성이기 때문에 극히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꽃이 지니는 독특한 환상적 체계로의 진행에 있어서 천경자의 강한 체취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예술가이든 영향은 받기 마련이다. 예술가의형성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자양은 다름 아닌 누구 에로부터의 영향이기 때문이다. 영향을 받지 않은 예술가란, 따라서 족보가 없는 사람처럼 공허한 느낌을 준다. 이숙자의 작가로서 형성에 천경자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은, 단순히 이숙자가 천경자에게서 배웠다는 사실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이어주는 뚜렷한 맥락과 계보의 튼튼한 뿌리의 형성에 다름 아니다. 바로 그러한 형성으로 인해 한국의 동양화는 그 나름의 풍요로운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자칫 영향을 모방으로 인식하는 풍조를 우리 주변에서 목격할 수 있는데 이런 그릇된 인식 때문에 영향이란 말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예도 없지 않다. 이 점은 앞으로도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 
민속적 소재에의 천착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 진행이 어쩌며 자기 세계의 확립에로 나아가는 길 일 것이다. 70년대에 들어오면서 이숙자의 화면은 자기 세계를 찾으려는 부단한 노력이 경주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일련의 민속적 소재에의 천착이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 보자기, 색실 함, 목안, 부채, 바느질함, 이불보, 꽃신, 색동옷, 기타 여인은 장신구 등이 민속적 소재의주요 내용들이지만 장이나 소반, 과일 등의 정물적 소재도 때때로 곁들여지고 있다. 민속적 소재는 물론 그가 처음 다룬 것은 아니다. 동서양화를 막론하고 민속적 소재에 대한 관심은 꽤 넓게 퍼져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개의 민속적 소재의 추구란 것이 단순한 이채로운 대상으로서, 골동취향적 대상으로서 극히 정물적 시각으로 포착된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숙자의 민속 소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일반적인 경향과 수준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민속적 소재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색채감각, 또는 정서로서의 색채체계의 발견이란 점, 두 번째는 적극적인 구성인자로서 선택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즐겨 다루었던 소재가 여인의 안방기물 또는 여인의 장신구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고, 그것은 혼례와 관계된 대상물이 태반이다. 말하자면 여성의 가장 애틋한 정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독특한 색채감각과 구성의 인자로서 만이 아닌 이것들을 에워 싸고 있는 여인의 다감한 정서의 세계가 조형화의 잠재된 요인으로 작용되고 있음을 엿보게 된다. 화려한 색채의 기물들은 이미 그 자체가 훌륭한 색채배합과 화면구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계통의 많은 작품이 극히 단순한 구성임에도 풍부한 변화를 느끼게 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이것은 또한 풍부한 색채의 발견과 구사에 값 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색을 구사하는가에 앞서 어떤 색을 발견 하는가는 특히 채색 화가들에겐 주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숙자가 일련의 안방 기물, 여인의 장신구, 혼례예물 등 전래의 풍속적인 생활 도구들에서 독특한 우리의 색채감각과 체계를 발견했다는 것은 색채화가로서의 확고한 자기확립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꽃이란 소재가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74년 개인전 때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민속적인 기물에서 꽃으로 소재의 관심이 추이되면서 보다 간결하고 극명한 묘사와 색체의 환상적인 톤이 증가되고 있다. 초기작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이숙자의 화면에서 일관되는 것은 형태의 간결하고도 극명한 묘출이라고 할 수 있다. 대상을 철저히 파 들어가는 사실적 묘출의 태도는 그의 단단한 데생력을 뒷받침 해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탄탄한 현실감각의 구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의 작품 가운데 현장감이 강한 내용들이 적지 않다는 것도 탄탄한 현실감각과 관계되는 것이다. 

간결하고 극명한 형태의 묘출
74년 개인전에 나온 꽃들은 극히 상식적인 정면향의 시각이 대부분이다. 화병에 꽂힌 꽃을 아무런 배경을 설정하지 않은 채 정면으로 오롯이 드러내 놓은 것이었다. 화병이 없는 경우는 꽃들로만 화면을 가득 채웠다. 때때로 꽃에 묻힌 젊은 여인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앞서 민속적인 소재에서 보여 주었던 조형화의 의욕이 지속되지 못한 채 안이하고 감상적인 소재 속에 자족하는 인상마저 주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 보면 그가 다룬 꽃의 종류-진달래, 코스모스, 수국, 다알리아, 튜립, 목련, 국화, 팬지, 나리, 수선 등-만큼이나 다양한 색채에 대한 탐구가 은밀히 지속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을 듯하다. 많은 종류의 꽃들이 단순히 다양성이란 명목으로 추구된 것이 아니라 색채의 발견이란 문맥에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꽃에 대한 그의 소재적 관심은 특별한 것일 수 있다. 특히 이 시기 작품들이 앞서의 민속적 소재에서 보였던 강렬한 원색의 구사가 아니라 색채의 투명성에 대한 감각의 깊이에 경주되었다는 데서, 그의 작업이 한결 높은 단계로 진입했음을 시사한다. 색채의 평면적 구조의 발견에서 변화를 지닌 생명의 속성으로서 질료를 추구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물질로서의 색채가 아니라 생명체의 질료로서 색채의 추구, 여기 색채화가로서의 심화되어 가는 세계를 확인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꽃과 더불어 비교적 초기에서부터 자주 등장하는 인물-거의가 여인-들은 꽃이 갖는 투명한 현실감에 비해 딱딱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 점은 최근에 시도되고 있는 <이브>시리즈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치밀한 데생에 의해 구사되고 있음에도 어쩐지 현실적 생동감이 빈약하다. 아마도 후기로 오면서 대상을 구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적인 틀 속에 대상을 끌어 들이려는 방법 상의 문제에서 빚어지는 현상이 아닌가 보인다. 다른 대상과는 달리 인물이 구성적인 틀 속에 적응하는 것은 그만큼 까다로운 일면을 지니는 지도 모른다. 누드가 다분히 구성적인 체계에 의한 것인데 반해, 현장감이 강한 인물들도 때때로 보인다. 수녀의 군집을 다룬 <기원>이나 80년 國展에서 대상을 받은 <작업>은 현장감이 강한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이들 현장감이 높은 작품들이 군집 형태라는 점, 즉 이런 공통점을 나타내고 있다. 교련복을 입은 대학생 군상을 다룬 작품이나 논에서 묘를 심는 마을 여인들을 다룬 작품이나 군집 해 있는 여인누드를 다룬 것은 한결같이 군상 이었다. 이 군집의 기호는 87년경부터 나타나는 <群牛>시리즈를 낳은 것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고 보면 색채에 대한 관심에 못지 않게 어느 한편에 선 형태에 대한 관심이 경주되었음을 엿보게 한다. 군집 형태는 독립된 단위의 등장과는 달리 이미 관계설정을 예시하고 있다. 두 사람 이상을 한 화면 속에 배치한다는 것은 두 사람 이상의 관계를 어떻게 조형화하느냐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 같은 관계설정은 말할 나위도 없이 구성적 체계의 경주에 다름 아니다. 군집이란 대상이 화면전체를 메우는 구성으로 유도될 수밖에 없다. 공간의 여백이란 것이 거의 없게 되는 것이다. 밀집된 공간, 통일된 공간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밀집 된 공간 또는 통일된 공간의 추구가 <보리밭>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음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추이라 하겠다. 

구성주의적 톤의 화면, <보리밭>
<보리밭> 시리즈의 출발을 77년 國展에 입선했던 <靑麥>에서 잡는다면 보리 밭이 소재를 다룬 기간은 최근까지 거의 10년을 웃도는 셈 이다. 한 작가가 하나의 소재를 줄기차게 반복하고 있는 경우는 적지 않는 일이지 만 10년을 넘게 한 소재를 천착해 왔다는 것은 단순한 소재에의 애착 에서만이 아니라 한 소재를 통한 이념과 방법의 집중현상 또는 심화현상이 라는 점에서 각별히 주의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자신의 독특한 상표처럼 소재의 반복이 상품화되고 작가가 이에 편승하는 예도 없지 않지만, 이숙자의 경우는 반복되는 소재의 추구 속에서 자신의 이념과 방법을 더욱 견고하게 다져간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 에서 '보리밭 화가' 라는 저널리스틱 한 명칭은 다분히 상품성을 강조해 주는 적절치 못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보리밭은 어떤 점에선 꽃이란 소재의 자연스런 변주에 값 하는 소재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수많은 꽃송이들을 화면 가득히 배치하던 것을 보리밭으로 대신한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꽃과 보리밭은 좀 더 다른 특징들을 지니고 있는듯하다. 우선 <꽃>시리즈가 정물적인 시각과 인식에서 출발된 것이고 다루어진 것이라면 보리밭 시리즈는 풍경적인 시각과 구성에서 접근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정물이란 어휘 자체나 개념 확립 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정지된 생물, 죽은 사물인 반면 풍경이란 살아있는 현상의 단면이다. 다같이 자연물 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닫혀진 것과 열려 진 것의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리밭은 현장감이 강한 소재임이 분명하다. 화실의 탁자 위의 화병에나 꽂혀 있는 대상이 아니라 화가가 직접 들녘으로 나가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이다. 그런데 그 보리밭은 더욱 밀착된 앵글에 의해 현장감을 북돋운다. 풍경적 시각이긴 하지만 요체화된 풍경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보리밭 속에서 보리밭을 바라보고 있는 시각이다. 이 같은 시각의 밀도는 보리의 낱알을 입체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방법에서 더욱 진해진다. 보리밭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리밭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현실감을 추구한 것이다. 
80년 중앙미술대전의 대상 수상작인 <맥파>는 완전히 익어 곧 거두어 들여야 할 보리의 낱알들이 생생하게 매달려 있는 모습을 실감 있게 보여주었다. 릴리프처럼 처리된 독특한 표현방법이었다. 누구나가 성큼 몇 줄기를 꺾어 가지고 싶은 충동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의 보리밭은 그 나름의 변화가 없지도 않다. 종류로 본다면 빳빳하게 하늘로 치솟은 청맥 에서부터 누렇게 익어 무겁게 고개를 숙인 황맥으로, 그리고 바람이 없는 고요한 들녘의 보리밭이다가 거세게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물결치는 보리밭이기도 하다. 때때로 보리밭 너머로 들녘과 야산이 펼쳐지는 원경이 들어오는 평화로운 풍경이기도 하고, 보리밭 가에 몇 송이 들꽃과 날아드는 나비들이 점경되기도 하는 서정적인 풍경이기도 하다. 목타는 가난의 보리고개를 연상시키는 파랗게 시린 보리밭이다가도 고호가 피스톨로 자살을 기도한 겉잡을 수 없이 물결치는 보리밭이기도 하다. 정감이 넘치는 풋풋한 들녘의 내음이 가득 차는 화면 이다가도 격정에 휘말리는 노도의 화면으로 변하기도 한다. 때로는 창틀로 바라보는 보리밭이 등장하기도 하고, 보리밭 위로 구름이 떠있는 풍경도 등장하지만, 역시 화면 가득 보리밭으로 채워져 있는 작품들이 그의 구성주의적 톤의 화면형성에 가장 상응되는 것으로 보인다. 

강인한 탐구욕, 견고한 자기세계
<이브>시리즈는 80년대 초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 시기는 보리밭 시리즈가 지속되고 있을 때이다. 이숙자의 전체 작품을 보면 어느 한 시리즈가 끝난 뒤 새로운 소재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은 계속해 오던 작품과 더불어 새로운 소재의 내용이 겸쳐져 진행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화가든 이런 중복현상은 과도기적 시기에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숙자의 80년대 후반기의 작품 가운데는 <보리밭>과<이브>와 여기에 새롭게 87년경부터 나타나는 <群牛>가 겹치고 있다. <보리밭)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편이지만 <이브>와 <군우>는 거의 동시에 추구되고 있다. 소재에서 본다면 퍽 이질적이지만 다같이 구성주의적 틀이라는 그의 기본적인 화면 전개국면에선 이상할 것이 없다. 두 시리즈 모두 짙은 구성주의적 틀에 의해 구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브>는 여인의 누드를 다룬 것이다. 그러나 광범한 모델로서의 누드가 아니라 환상 속의 여체, 또는 원생적 풍경 속에 등장하는 여인의 모습이다. 대담하고도 관능적인 포즈의 누드작품은 기도하는 여체의 아름다움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에덴이라는 원생적인 세계 속에 등장하는 적나라한 자연물로서의 여체로서, 그리고 운명적으로 낙원을 추방당해야 하는 원죄의식의 여인으로서 등장되고 있다. 따라서 <이브>시리즈는 단순한 여인의 누드가 아니라 추방당한 낙원과 원죄에 몸부림 치는 아득한 태고의 풍경, 원생적 풍경으로서의 여인 이랄 수 있다. 그것이 엄격한 데생에 의한 여체의 묘출이면서도 현실감보다는 초현실적 감정에 부단히 치우치게 하는 것은, 이미 현실이 아닌 세계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群牛>는 우선 대형화면이라는 점에서 구성의 웅대한 스케일을 느끼게 한다. 아직은 몇 작품밖에 제작되지 않았으나 화폭의 스케일로 미루어 볼 때 다른 시리즈의 수십 점과 맞먹을 수 있는 내용이다. <꽃>시리즈나 <보리밭>시리즈에서 엿볼 수 있는 군집현상의 연장이란 점에서 군우는 그의 일관된 톤의 또 다른 변주에 해당시킬 수 있다. 안으로 파고드는 박진감 있는 시각의 밀도에 있어서는 <보리밭>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보리밭>과 거의 같은 시점에서 다룬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리밭> 대신 소들이 들어왔을 뿐이다. 그러나  <군우> 시리즈에선 색채보다는 대상이 갖는 형상의 특징에 더욱 기울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소의 생태적인 단면, 골격의 해부학적인 면밀한 관찰이 화면을 지배하고 있는 인상이다. 채색위주의 경력으로 볼 때 다소 이채로운 면 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단순한 구성적 틀의 적절한 대상으로 群牛가 선택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틀과는 무관하게 색채와 형태의 새로운 모색으로써 다루어진 것인지는 더 많은 진행을 통해서야 확인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숙자의 전 작품을 일별하면서 느낀 것은 그가 누구보다도 강인한 탐구욕의 작가라는 점, 자기 세계를 견고하게 다져 나가는 작가라는 점 이었다. 부분적으로는 아직도 불명료한 요소, 때로는 의욕과잉과 감상적인 자기탐닉 같은 요소도 없지 않지만, 자신이 추구하려는 세계와 이에 상응되는 방법의 견고한 틀의 형성을 동시에 주도하게 밀고 나가는 작가도 흔치는 않을 것이라 본다.


문서 다운로드